블루오션, 불안한 바다
항간에 유행어가 되고 있는 [블루오션 전략]은 기실 그보다 몇 년 전에 소개된 [제 4세대 R&D론]과 별반 다르지 않다.
굳이 이 둘 사이의 차이를 들자면 [4세대 R&D론]이 좀 더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맥락을 강조한 반면 [블루오션 전략]은 실제 경영전략과
관련된 실용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책, 혹은 입장이 제기하고 있는 한 가지 공통적인 핵심화두는 Needs와 와해성
기술혁신을 통합적으로 사전설계하고, 이를 장기 전략경영의 기초로 삼을 때에만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이 널리 알려져서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블루오션]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거론 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블루오션]론은
우리의 의식 밑바닥에 가로놓인 미래에 대한 불안한 전망을 자극하는데 성공했으며,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나름대로 명쾌하게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우리나라가 살 길은 인재양성과 기술혁신밖에 없으며, 특히 IT를 이은 다음 세대 성장동력을 하루빨리 찾지
못한다면 현재의 어려움이 더욱 심각하게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 벌써 몇 년째 지속되고 있는 경기불황, 경제 양극화
현상은 우리나라의 성장 잠재력을 구조적으로 한 단계 다운그레이드 시킬 만큼 심각하다.
게다가 우리나라 경제를 지탱해 오던 컴퓨터 전자통신(ICT) 조차 내수시장의 경우는 몇몇 대기업들에 의해 시장이 분할 점유되면서 치열한
경쟁상태에 놓여져 있고, 수출시장은 중국이나 인도의 추격이 맹렬하다. 시장이 성숙단계를 넘어 포화단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유비쿼터스를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내세운 IT를 제외하고는 미래를 대비할 우리나라만의 차별적인 국제적 우위를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인식이 저 의식의
밑바닥에 가로놓인 불안감의 근원이다. [블루오션 전략]은 우리안의 불안감을 슬쩍 건드린 뒤에 와해성 기술(disruptive
technology) 혁신을 통한 새로운 시장창출을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와해성 기술에 근거한 새로운 시장창출 전략은, 만약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나만의 새로운 신천지를 여는 일이다.
와해성 기술혁신과 아키텍처링
블루오션이라는 말을 들으면 짙푸른 바다를 유유하게 파도를 가르는 고래가 연상된다. 그 고래 밑으로는 화려한 산호초와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고 그 아래로는 무진장한 해양광물이 숨겨져 있는 모습을 그릴 수 있다. 블루오션 전략이 약속하는 미래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리라. 하지만 과연 블루오션이 이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것일까? 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검은 밤바다를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블루오션을 만날 수 없으며, 블루오션이 열리자마자 경쟁의 소용돌이가 쪽빛 바다를 휩싸고 돌기 때문이다. 70-80년대의
IBM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블루오션을 이끌었던 기업이 경쟁의 소용돌이에 파묻혀 좌초의 위기에 빠지는 경우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4세대 R&D전략과 블루오션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내보자.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수요예측과 기술융합을 통해 만들어지는 와해성 기술혁신은 그 시작부터 산업과 시장에 대한 새로운 설계를 이미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와해성 기술혁신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시장을 재편하며, 기존시장을 지배했던 거대기업들을 한순간에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어버린다. 새로운 잠재적인 경쟁자는 와해성 기술혁신에 필요한 조직역량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신규진입이 한동안 가로막힌다. 결국 독점적인
시장지배가 유지되는 것이다. 게다가 와해성이 크고 넓을수록 혁신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기업의 지배적 영향력이 커지게 된다. 소재 및 부품공급망을
따라 새로운 기업간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그 네트워크의 구조는 와해성 기술혁신의 기술적 특성 혹은 아키텍처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파괴를 통한 창조, 가치연쇄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와해성 기술혁신이 새로운 가치연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잠재적인 필요(needs) 혹은 잠재적 시장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기술로는 이러한 필요를 충족할 수 없었던 시장이 등장하거나 혹은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서 만들어진 틈새시장이 빠르게
주류시장으로 전화되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40년대의 라디오와 70년대의 PC를 들 수 있다. 두 시장 모두 소규모 취미
동호회로부터 시작되어 5년 이내에 Mass Market 변화되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새로운 시장이 열릴 경우 그 효과는 와해성 기술혁신을
주도했던 기업뿐만 아니라 새로운 창업과 투자의 열풍을 불러올 수 있다. 창업투자의 물결이 높고 거세며, 집중될수록 새롭고 강력한 차세대
성장동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와해성 기술혁신을 최초로 성공시켰던 기업이 충분히 유연한 내부조직역량을 가졌다면 기술 아키텍처 선점의 효과를 이용, 차세대 성장동력의
흐름을 주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새롭게 등장한 신규시장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면 기술적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이끌기 보다는 밀려날 가능성이 더 높다. 일단 와해성 기술이 일반화되면 경쟁력의 관건은 수요변화에 대한 통찰력과 유연성을 축으로,
그리고 value/cost를 잣대로 삼아 변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IBM의 on demand business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IT를 통한 지식의 확산은 과학기술 혁신의 속도를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으며, 그에 따른 제품 수명 주기 역시 하루가 다르게 단축되고 있다. 4세대 R&D론이든 블루오션
전략이든 모두 Needs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수요정식화(demand articulation)와 기술융합(technology fusion)이
통합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 수요변화의 흐름에 적시유연한 대응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좁은 문, 목숨을 건 도약
이처럼 4세대 R&D 전략, 혹은 블루오션 전략은 파괴와 혼돈, 장밋빛 미래창조와 급속한 성장이 동시에 공존하는 불확실성의
세계이다. 게다가 불확실성은 기술과 시장 두 차원 모두에서 존재하며, 장밋빛 미래는 두 영역의 불확실성을 동시에, 그것도 적절한 시점과 적절한
장소에서 해결할 수 있을 때에만 보장된다. 목숨을 건 도약으로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성취가 바로 블루오션인 것이다.
하지만 블루오션 전략은, 다음 회 연재에서 살펴보겠지만, 개별 기업 차원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장기적 생존을 위한 필수적
관문이다. 문제는 누구도 그 첫 도전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중의 불확실성을 감당하기 보다는 후발주자의 장점, 모방자의 안정성을 선호하기
때문이 그 첫째 이유이며, 두 번째 이유는 블루오션 전략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기술-지식-자본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실 블루오션 전략이란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일 뿐이며, 슘페터가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창조적 파괴를 이끄는 창조적 혁신기업가들은 범인이 아닌 초인(Superman),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소수의 천재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이다. 그래서일까? 경쟁을 허락하지 않는 유일한 기술 강대국 미국의 거대기업들조차 와해성 기술혁신에 대한 연구개발 투자는
10%를 넘지 않는다. 발 빠른 공정혁신과 수요변화에 대한 유연한 대응으로 제품차별화를 시도했던 일본에 맞서 와해성 기술과 수요예측을 통합하는
4세대 전략을 대안으로 들고 나선 미국기업들조차 정작 블루오션을 위한 연구개발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단어의 인플레이션을 넘어서
이러한 사정은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사정은 훨씬 심각하다. 블루오션이라는 단어가 주는
환상적인 미래 이미지를 활용해서 대중의 관심을 끌어보고 싶은 정치인들, public reputation을 주가로 연결하려는 경영인들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블루오션을 주창했으나 정작 단어의 인플레이션만을 만들어 냈을 뿐 실질적인 도전의 흐름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4세대 R&D전략을 맨 처음 대중적으로 소개한 곳은 삼성이고, 블루오션을 소개한 곳은 LG이다. 그러나 LG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연구개발 투자총액의 30%, 즉 4조원에 가까운 R&D 투자지출을 하고 있는 삼성에서조차 차세대 기술패러다임이라고 일컫는 INBT
융합기술과 관련된 미국특허는 고작 15개일 뿐이며, 인용도 5회 이상을 넘는 특허는 단 한건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물론 이윤추구를 본질로 삼는 기업들에게 국가적 이익을 앞세워 불확실성과 위험으로 가득찬 4세대 혁신전략, 혹은 블루오션 전략을 추구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며, 그렇게 요구한들 기업들이 이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 역시 없다. 게다가 대개의 대기업들은 그 본질상 와해성 기술혁신,
블루오션 전략을 선호하지 않는다. 대기업들의 입장에서 본 블루오션 전략은 불확실한 미래시장에 대한 댓가로 이미 확고하게 구축된 현재의
시장지배력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의 입장에서는 와해성 기술혁신을 주도할만한 기술-지식역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특히 현대
기술혁신은 과학적 지식기반, 시스템적 혁신역량을 요구한다. 잃을 것보다는 얻을 기대수익이 더 많은 중소기업들이 창조적 파괴를 주도할 적격자임에는
분명하지만, 문제는 그럴 능력을 갖추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쯤해서 다음 연재 글을 위해 정리해보자. 4세대 혁신전략, 혹은 블루오션 전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그렇다면 실제적인 변화보다는
단어의 인플레이션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스스로 나서서 창조적 파괴를 만들어내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블루오션 전략이
중심이 되는 국가혁신체제, 그 구조적 조건을 만드는 것은 물론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블루오션 전략을 실제로 실행하고, 변화를
이끌어가는 주체들은 기업이다. 따라서 다음 글에서는 블루오션 전략의 구조적 전제조건을 먼저 살펴본 뒤, 수요예측과 기술융합, 아키텍처링과 지배적
디자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한 가지씩 살펴볼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블루오션 전략을 실행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요예측에 기반한
아키텍처링이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수요예측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여기에서 거론하고 있는 수요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가?
글쓴이: 스카이벤처 전문가 김태억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