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사람이 더욱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옷깃사이로 쌀쌀한 바람이 스며들면 마음 따뜻한 사람, 손이 따뜻한 사람이 불현듯 생각난다. 생각날 때 달려가서 만날 수 있는 거리에 그 따뜻한 사람이 있어 함께 할 수 있다면 혹한(酷寒) 설풍(雪風)의 매서운 겨울날씨도 두려워하지 않고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의 초입에서 바람이 하늘을 멀리 허공으로 밀어낼 즈음이면, 나무잎새들은 가장 고운 빛깔로 자신의 고고함을 들어내 보인다. 초라해져가는 아름다움을 지탱하기 위해,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확고하게 보여주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그렇게 버티다가 끈을 놓아버리면 한 순간에 땅바닥으로 떨어져서 이리저리 바람에 쓸리는 초라한 신세가 되어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 길가에 나뒹구는 낙엽들의 바스러지는 모습은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는 그리움이 아픔으로 작은 불씨를 지피고 한 해의 끝자락에 서면 갑자기 불길이 확 살아난다. 허둥지둥 신산(辛酸)한 삶을 꾸려가노라 보고 싶은 사람, 만나야 할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둔 말조차 전하지 못한 지난 세월을 후회하며 삶을 되돌아보는 12월은, 조급한 마음으로 그리운 사람을 찾아 헤매게 되어 가장 많은 만남이 이루어지는 달이기도 하다. 이 만남의 자리는 날씨와는 상관없이 그리움을 푸는 기쁨이 있고 웃음이 있어 훈훈하기가 그지 없다. 그러나 가슴 저리도록 보고 싶은 그리운 사람이 있지만, 만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움을 부추기는 계절의 서늘한 기온보다 몇 배 더 마음의 체감온도는 떨어져서 뼈 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와 외로움을 탄다. 그리운 사람이 더욱 그리워지는 때,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어 더 외롭고 한기를 느끼는 때, 이래서 겨울은 슬픈 계절이 된다. |
|
사람은 제 각각 다르긴 해도 어떤 형태이건 그리움을 안고 살아간다. 일생동안 상대는 바뀌어도 그리움은 계속 이어진다. 강보에 쌓인 아기마저도 눈에 엄마의 모습을 익혀 매 순간 엄마를 그리며 찾는다. 유년의 시절, 청소년 시절, 장년의 시절, 그리고 노년기, 시대와 상황은 바뀌어도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만나고, 또 만나면서 그리워하며 사는 것은 한결같다. 때로는 한 그리움으로 해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따르고 슬픔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떨어내려고 하지 않고 품는다. 만남을 단념하고 포기해버린다면 편해질 수 있는데도 아파하면서 슬퍼하면서 오히려 그리움을 키운다. 자신을 버리고 모른 체 하는 자식, 서로 사랑하다 배신해서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신의를 저버려 삶에 큰 피해를 입게한 친구나 친지, 그래도 원망보다 그리움이 더 진하다. 그리운 사람은 그대로 그리운 사람으로만 남아 있어 언젠가는 만나고 싶은 대상으로 남아 있다. 철륜도 인연이고 악연도 인연이고, 인연이 그리움의 씨앗을 뿌리고 씨앗은 자라기만 할 뿐이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많다. 어느 여인은 젊은 날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을 가슴에 안고 평생 그 사람을 그리며 살았다. 자녀도 없이 혼자 살며 초로에 접어들었지만, 외로워 보이지도 처량해 보이지도 않으며 우아하게 삶을 잘 꾸려가고 있어 주위에서들 가끔 신비하다느니 비련(悲戀)의 여성이라느니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비련이라는 말을 가장 듣기 싫어하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 사랑했던 시간이 소중하고 아름답고, 그 사랑을 영원히 가슴에 간직하고 그를 그리며 사는 것이 행복인데 비련이라니 당치않다 하였다. 이 여인을 떠올리며 나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사람에게 ‘만날 수도 없는 사람 이제 그만 생각하고 잊어버리세요.’라는 말 대신 ‘그래요. 가슴에 담고 오래오래 그리워하며 아름답게 살아요.’하는 것이 더 적절한 위로의 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
올해는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내 곁에서 사라지게 한 아주 가혹한 해이다. 육신은 비록 사라졌다 해도 순간순간 그를 생각하고 아쉬워하다보면 그리움이 아픔이 되고 눈물이 된다. 마음도 체온도 따뜻했던 사람을 보내고 이 쓸쓸한 가을을 어찌 보내며 또 추운 겨울은 어떻게 맞을 것인가? 두렵고 대책이 없었다. 누구나 다 겪고 때가 되면 너나 없이 모두 떠나는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일을 당했는데 왜 그리도 서럽고 억울하고 부끄럽던지……. 내 눈물단지에 그렇게 많은 눈물을 담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몰랐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눈물, 낯선 사람들의 시선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울고 싶을 때 울자, 그리고 마음껏 그리워하자’ 수없이 독백을 하면서 나는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워하며 홀로서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보고 싶다면서 이런저런 하소연도 하며 그리움이 용기와 의욕을 북돋아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목(裸木)으로 변해가는 나무를 본다. 젊었을 때는 다 빼앗기고 앙상하게 벗은 것이 보기 싫다 했던 나무, 중년이 되어서는 훌훌 다 내어주고 알몸으로 새 찬 바람과 눈발과 맞서 의연하게 서 있는 것이 당당해서 보기 좋다 한 나무, 그 나목이 올해는 새로운 의미를 안고 내 곁으로 다가온다. 그리움에 젖은 눈으로 잎을 떨구고 옷을 벗는 가련한 나무를 바라보니 잎이 떨어져나간 아픈 자리마다 그리움이 묻어 있다. 봄, 여름, 가을, 계절 따라 보여준 현란한 잎새들의 아름다움을 다시 공유하기 위해서는 매서운 찬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리는 겨울나기 고통을 극복해야 하고, 그 고통을 그리움으로 다스린다. 나무는 초라한 자신을 잊는다. 풍성하고 아름다운 지난 날의 그 숲은 추운 겨울이 지나 때가 되면 다시 싱싱하고 화려하게 펼쳐 보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간이 바라는 궁극적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고통 없이 얻어지는 행복이 과연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을까? ‘인간에게 고통이 있음으로 참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을 지금까지 수없이 들어왔으며 또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얼마 전에는 한 수녀가 쓴 인간에게 고통의 필요성을 강조한 충격적인 글을 읽었다. 그 글의 내용 가운데는 통증을 느낄 수 없는 희귀질환인 CIPA라는 병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이 병은 유전자 돌연변이로 고통을 뇌로 전달하는 신경섬유가 발달하지 못해 촉각은 정상이지만 냉온(冷溫)이나 아픔을 전혀 느낄 수 없어 자신의 신체에 어떤 상처를 당해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다고 한다. 실제 이 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은 아이 스스로 혀와 입술을 물어뜯기도 하고, 펄펄 끓는 물에 손을 넣고도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지난 해 미국에서 방영된 바 있는 이 병에 대한 기록영화 <고통 없는 삶>을 본 많은 관객들의 반응이 “고통 없는 소녀들을 보는 것은 정말로 엄청난 고통이다”라고 했으며, CNN에서 이 병을 앓고 있는 아이를 소개했을 때, 그 아이의 어머니는 ‘고통 없는 세상은 지옥’이라며 울부짖었을 만큼 인간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비극적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글을 읽고난 후 나는 인간이 겪어야 하는 고통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그 고통의 범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고통과 행복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어쩌면 고통이 아닐 수도 있다. 가슴 저리게 하는 그리움은 고통이 아니라 행복임을, 그리고 삶의 활력이 된다고 생각하면 이 겨울이 좀 따뜻해질 것도 같다. |
|